노블레스 오블리주 독립운동가 우당 이회영
- 역사정보
- 2019. 9. 8. 23:10
노블레스 오블리주 독립운동가 우당 이회영
이번글은 독립운동가인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신 우당 이회영 선생님에 대해서 작성을 하겠습니다.
금일자 도전 골드벨의 50번 문제로 출제가 되었는데 저는 틀렸습니다. 죄송합니다 선생님. 역사에 자신이 있었고, 책으로도 기억하고 있었는데, 이시형이라고 자신있게 말을 했지만; 틀렸다는.. 조선에서 삼한갑족이라고 불리던 명문가로 평생 보장된 신분을 버리고 압록강을 건너서 독립운동을 하셨습니다. 명동일대의 땅을 소유를 하고 있었고 현시가로 천억원정도의 가격이라고 합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우당 이회영 선생님이라고 제가 표현을 하였는데, 이뜻을 지식백과에서 참조를 하였는데요.
요약을 하면 사회 고위층 인사에게 요구되는 높은 수준의 도덕적 의무라고 합니다.
근대와 현대에 이르러서도 이러한 도덕의식은 계층관 대립을 해결할 수 있는 최고의 수단으로 여겨져왔고, 특히 전쟁과 같은 총체적 국난을 맞이하여 국민을 통합하고 역량을 극대화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기득권층의 솔선 수범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이회영 독립운동가 선생님께서는 일제의 침략이 되던 1867년 서울 남산골에서 이유승의 4번째 아들로 태어납니다. 아버지는 이조판서를 지낸 인물이고 역대로 계속 높은 벼슬을 받은 집안입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뛰어넘었다는 표현이 맞는것 같은데 6형제 50여명의 가족이 만주로 망명을해서 독립운동을 했습니다. 항일후 20여명이 생존을 했습니다.
1905년 을사조약으로 외교권박탈후 고종을 만나서 헤이그 특사로 외국어를 잘하는 사람을 보내서 다시 주권을 되찾자고 계획을 합니다. 하지만 헤이그 특사를 빌미로 일본은 고종을 퇴위시키고 1910년 완벽하게 대한제국(조선)은 망하게 됩니다.
이후 일본에서는 한국의 고위인사를 회유하기위해 은사금을 주었는데 이회영선생님의 가문은 이돈을 받지 않고 6형제가 만나서 주권을 되찾기위해 계획을 합니다. 6형제와 노비 50명은 중국의 서간도로 이동을 합니다. 이때는 12월로 서간도의 온도는 영하 30도였다고 합니다. 서간도에서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합니다. 여기서 졸업을한 인물로는 지청천이있습니다. 또한 여러 청산리대첩등의 전투에서 졸업생이 참여했습니다.
이렇게 10년간 무료로 모든 3000명의 졸업생을 배출하고나니, 이 천억이라는 돈을 다사용을 하였고, 이후 가난한 생활을 하게 됩니다.
이회영선생님은 의열단의 김원봉선생님을 후원을 합니다. 이후 관동군 사령관을 처치하기 위해 만주로 갑니다. 거사를 치르기 위해서였죠.
하지만 거사를 하지못하고, 배에서 내릴때 정보가 일본군에 들어가서 잡혀서 만주의 뤼순감옥에서 순직을 하게 됩니다.
결론적으로 6명의 형제들중 5번째 이시형만 생존을 하였고, 혼자 광복을 보게 되었고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이 되었습니다.
초기 대통령 이승만은 이시형에게 국가 차원에서 600억을 환급해주겠다고 하였는데 이를 거부를 했습니다.
역사 공부를 하고 관련글을 올리면서 다양한 생각을 하게 되는데요. 만약에 내가 이돈이 있고 기득권으로써 지킬수 있었다면 과연 선생님처럼 행동을 할수 있었을까? 라는 생각을 합니다. 여러분들은 어떠신가요? 가능하시겠습니까?
또한 만약 이 6형제가 마음을모아서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지 않았다면 우리 나라는 어떻게 독립을 위해서 운동을 할수 있었을까 라는 생각을 합니다. 여러 독립군들의 전투는 이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한 졸업생들의 힘으로 전개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후손으로써 이 뜻을 본받고 영원히 기억을 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다음도 다른 역사정보로 돌아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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